후백제와 태봉, 삼국시대 이후의 나라

삼국시대 이후의 나라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는 후백제와 태봉이라는 두 개의 나라가 존재했습니다. 후백제는 견훤에 의해 건국된 나라로, 그의 출신 배경은 신라의 상주 지방에서 농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견훤은 신라군에 입대하여 큰 공을 세운 후, 진성여왕 시절 신라의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892년에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무진주를 점령한 뒤 독자적인 세력을 선언하며, 백제의 재건을 꿈꾸었습니다. 그의 무리는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고, 한 달 만에 5천 명을 넘는 세력을 형성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백제의 재건을 기치로 삼고, 전주에 수도를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한 후, 중국의 오나라와 월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으며 영토 확장에 힘썼습니다. 그는 대야성을 공격하기도 하고, 왕건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외교적인 유대를 맺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야성 공격과 진례성 침공으로 인해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후백제와 고려 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반면, 신라와 고려는 후백제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군사적으로 대응하며 더욱 친밀해졌습니다. 견훤은 대병을 이끌고 신라의 수도 금성을 침공하였으며,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는 동안 수도 경주를 급습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고려의 왕건은 직접 군을 이끌고 견훤군과 맞섰지만, 특별한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종종 충돌하며 서로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결국 왕건의 침공으로 많은 성을 잃으면서 후백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후백제 내부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견훤은 여러 아내에게서 수십 명의 아들을 두었고, 넷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인 신검은 불만을 품고 두 동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검은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넷째 아들을 죽인 뒤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견훤은 절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고, 후백제는 내부 분열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후백제는 고려에게 항복하면서 후백제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후백제와의 외교

견훤은 전주를 도읍으로 삼고 후백제를 세운 뒤, 외교적으로는 오월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썼습니다. 당시 오월은 강소성과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번영한 국가로, 청자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남해 교역의 종점이자 해상 교역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백제는 오월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고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견훤은 오월과의 협력을 통해 후백제의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다양한 자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와 같은 외교적 노력이 후백제의 경제적 번영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태봉국이 나주를 빼앗으면서 후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무역로이자 교역의 중심지인 나주를 잃게 되었습니다. 나주는 후백제에게 중국과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다양한 자원과 물자가 교환되던 곳이었습니다. 나주를 잃은 후백제는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외교적 입지도 약화되었습니다. 나주의 상실은 후백제 내부의 불안정을 초래했고, 결국 후백제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견훤이 꿈꾸던 후백제의 번영은 나주의 상실로 인해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태봉의 등장

궁예는 본래 북원의 적괴 양길의 부하로서 강원도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는 임진강 일대를 점령하여 독자적인 기반을 다졌고, 이 시기에 유능한 인재인 왕건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됩니다. 궁예는 왕건에게 철원태수의 벼슬을 주어 양길에 대항하게 했고, 왕건의 도움으로 양길의 지역을 빼앗아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고 정하고, 고구려를 대신하여 신라에게 복수하겠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진’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며 신라의 관제를 참고하여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나,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기, 황해 대부분, 평안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점령하여 신라나 견훤의 후백제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태봉은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왕건에게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 후백제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국토가 넓어지자 궁예는 대규모 궁궐을 건축하고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 칭하며 불교 사상을 통해 국가를 통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민중 지향적인 정치 방향에 불만을 품은 측근자들과 호족들은 결국 왕건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게 됩니다.

결국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명주성으로 도피하게 만들었고, 궁예는 도중에 왕건의 추격을 받아 자결하게 됩니다. 궁예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화전민들에게 발각되어 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사>에서는 산골짜기에서 이틀 밤을 지내다가 허기져서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군중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궁예가 쫓겨난 후에도 한동안 그의 친위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백제에 귀부하기도 했습니다. 마군장군 환선길은 왕건의 정변에 가담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그의 동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결국 처형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장수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처형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공주나 청주 지역의 구 백제계 호족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철원 풍천원 일대에는 궁예 도성, 또는 궁예성지라 불리는 태봉국의 도성 터가 남아 있습니다. 궁예가 종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 후 왕건에 의해 폐위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이 곳은 현재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어 양측 학계가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성터 남문에 있던 석등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소재가 불명해졌습니다. 이처럼 궁예의 흔적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그의 이야기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후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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