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조선 후기

혼란의 시대, 조선 후기의 시작

조선 후기는 굉장히 불안한 시기였다. 사림파의 지지를 바탕으로 즉위한 인조는 명나라와 외교에서 친선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청나라를 자극하게 되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인조는 청의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해야만 했다. 이와 더불어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과 백성들이 청나라로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은 군신 관계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의 호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졌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어 백성들은 끊임없는 가난과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의 고통을 겪으며, 조선은 혼란과 불안의 시기를 지나가야만 했다.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북벌론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 관계가 되었으나,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실제로는 국방 강화에 힘을 쓰며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인조 다음으로 즉위한 효종은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면서 북벌을 준비했다. 이 기간 동안 약 45,000명 이상의 군사들을 모았으나, 효종의 사망 후 북벌론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현종과 숙종은 서인들을 배척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결국 서인들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서인들은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지켜보며 북벌론을 다시 제기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고, 현실적으로 북벌은 어려워 보류되면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북벌론은 병자호란 때 자신들이 자초했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자, 남인들의 정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북벌론은 전란 후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조선 사회의 낙후 속도를 더욱 빠르게 했다. 반면, 청나라는 중국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증가하는 시기였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이로운 것들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붕당정치

서인들의 정치력은 지주제를 근본으로 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서인 정권은 사회의 변화에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남인들의 도전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주도하는 정국에 꾸준히 진출하였으며, 특히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서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남인은 서인 정권의 개혁이 부당하다고 비판하며 북벌론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예송논쟁은 이러한 대립의 대표적 사례로, 효종의 상복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서인은 임금도 사대부로서의 예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남인은 임금에게는 다른 예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서인은 신권 중심의 사상을, 남인은 왕권 중심의 사상을 강조하게 되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남인은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서인들은 남인들을 철저히 탄압하며 그들의 재기를 막았다. 서인들 내부에서도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 화해하자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간의 대립으로 정국은 혼란을 겪었다. 조선의 정치는 붕당 정치의 기본인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고 상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주도되었다.

이때 숙종은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정책을 펼쳤다.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몰아내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위임하는 환국 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는 경종 때까지 이어져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조선의 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일어났다. 화폐 경제 체제가 발달하면서 정치 집단들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정치적 쟁점도 군사력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군영을 장악하는 데 집중되었다.

 

탕평정치

영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정권을 장악한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려는 소론으로 나뉘며 매우 강경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영조는 당쟁을 피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고,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였다. 탕평론은 예를 들어 노론을 한 사람 기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기용하는 쌍거호대를 실시하는 방법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방식으로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정조에게까지 이어졌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파들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 정치 의지를 더욱 발전시켰다. 이는 상대 파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관행을 없애려는 조치였다. 또한, 당시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조정에 임금이 직접 개입하여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는 동시에 임금과 정승들의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갔다.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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