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중기 역사
고려의 중기는 거란의 침입과 이에 대한 고려의 외교적 및 군사적 대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10세기 초, 요나라(거란)는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전쟁을 계획하며 외교적, 군사적 고립을 시도했습니다. 요나라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차단하기 위해 고려와의 관계를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나라는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을 공격하여 고려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였으나,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거란의 요나라는 고려에게 고구려의 옛 땅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고려가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교류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에 대해 고려는 요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군사적 방어와 외교적 대응을 병행했습니다.
고려의 서희는 요나라의 군사적 위협을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993년, 서희는 요나라의 사신을 맞아 압록강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외교적 협상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서희의 협상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요나라가 고려의 정통성을 인정한 점입니다. 그는 요나라에 고려의 고구려 후예로서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외교적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협상 결과로 강동 6주는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는 고려의 북진 정책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서희의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요나라는 다시 고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010년, 요나라의 성종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개경을 점령하는 등 고려의 수도를 위협했습니다.
이 시기의 전투에서 강조는 초기에는 거란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지만, 봉주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개경이 일시적으로 점령당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후 양규 장군의 지휘 아래 고려군은 거란군의 기세를 꺾고, 요나라 군은 고려의 강력한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습니다.
1018년, 요나라는 다시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의 강감찬 장군은 귀주대첩에서 요나라 군을 크게 무찌르며 고려의 국방을 지켰습니다. 귀주대첩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로, 고려군은 요나라 군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귀주대첩의 승리는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고려는 요나라의 침략을 완전히 차단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와 요나라 간의 세력 균형을 다시 잡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고려는 국방 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고려는 나성을 쌓아 개경을 방어하고, 천리장성을 북방에 건설하여 요나라와 같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천리장성은 고려 북부의 국경 방어선을 강화하는 중요한 방어시설이었으며, 고려의 국방 전략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또한,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국제적인 외교적 균형을 추구했습니다. 고려는 외교적으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요나라와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습니다.
고려 중기의 전쟁과 외교적 성과는 고려 왕조의 국방력 강화와 외교적 자립을 실현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서희와 강감찬의 전략적 대응은 고려의 국방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려의 북진 정책과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의 군사적 승리는 단순히 외세의 침략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송나라-요나라 간의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쟁과 외교의 과정에서 고려는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과 국제적 입지를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여진족과 9성의 개척
고려의 북쪽, 특히 두만강 연안에는 여진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은 주로 기마 민족으로서 북방의 거친 환경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고려는 초기에 여진족과의 관계를 경제적 지원과 동화 정책을 통해 유지하려 했습니다.
동화 정책이란 고려가 여진족을 고려의 문화적, 정치적 범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고려는 여진족의 경제적 지원을 통해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교류와 협력을 통해 갈등을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회유책은 여진족의 세력 확장에 큰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12세기 초, 여진족의 완옌부 추장이었던 아군(완옌부 추장)은 다른 여진족 부족들을 통합하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력한 기병 중심의 군대를 조직하였고, 이는 고려의 보병 중심 군대와 큰 전력 차이를 보였습니다.
여진족의 아군은 하얼빈 지역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1115년 정주까지 침략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진족의 공격은 고려에 큰 위기를 안겼고, 기존의 북방 방어 체계로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윤관 장군은 별무반의 창설을 제안하였습니다. 별무반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한 기병 중심의 특수부대로, 고려의 전투력을 크게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진족의 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성해졌고, 금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금나라는 만주 일대를 장악하며 강력한 군사적 세력을 형성하였고, 고려와의 군신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여진족과의 관계는 고려 중기에 국방 전략과 외교 정책의 중요한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별무반의 창설과 9성 방어는 고려의 군사적 능력과 전략적 대응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금나라와의 군신 관계는 고려의 외교적 전략의 복잡함을 상징하며, 고려가 국제 사회에서의 위상을 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진족과의 전쟁과 금나라와의 군신 관계는 고려 왕조의 국방 전략과 외교 정책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고려가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위협을 동시에 관리해야 했던 어려운 시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12세기 고려는 문벌 귀족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시기였습니다. 문벌 귀족이란, 고려 초기에 관직에 진출하여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 가문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대대로 관직에 진출하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누리면서 고려 사회의 지배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은 과거제를 통해 관리로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고, 관직은 자손에게 세습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와 함께 혼인 정책을 통해 서로 긴밀한 연대 관계를 형성하고, 때로는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확대했습니다.
문벌 귀족들은 오랜 시간 동안 권력을 독점하며 부패와 비리를 양산했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무능과 부패로 인해 국가의 정책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이는 고려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이자겸은 경원 이씨 가문 출신으로, 11세기 이후 문벌 귀족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고려의 예종의 측근으로서 정권 장악에 성공하였고, 이후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이자겸은 고려 정치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자겸은 내부적으로는 문벌 귀족 중심의 질서를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금나라와 협력하는 등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왕실의 반감을 샀고, 결국 이자겸의 권력 야망이 왕권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난을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1126년, 이자겸은 군사적 반란을 일으켜 인종의 권력을 위협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었지만, 척준경과의 갈등으로 인해 반란이 실패하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의 분열을 드러내며, 고려의 문벌 귀족 체제가 붕괴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척준경은 이자겸을 탄핵하고, 고려 왕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척준경의 반격으로 이자겸은 실각하게 되었고, 이후 귀족들의 권력은 일단 진압되었으나 고려 사회의 내부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왕권의 회복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묘청은 서경 천도를 주장했습니다.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보수적인 개경 문벌 귀족들에 대한 대항을 시도했습니다.
서경 천도는 정치적 개혁과 왕권 강화를 목표로 했지만, 당시 고려 사회의 보수적 성향과 내부의 반발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응하여, 김부식과 같은 개경 귀족들은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사회 질서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김부식은 민생 안정과 금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국가의 안정성을 추구했습니다.
김부식은 국방 강화와 외교적 협력을 통해 고려의 외부 위협을 관리하고,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고려 사회의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목표로 한 대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