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최초의 나라, 고조선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건국된 대한민국의 최초 국가입니다. 고려시대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책에서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불렀지만, 현재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릅니다.
많은 서적에서는 고조선의 시작을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연의 책에서는 요임금 즉위 50년을 정사년으로 보고 시기가 불확실하다고 했으나, 다른 책들에서는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며, 그 때가 요임금 무진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평양에 도읍을 정했지만, 이후 백악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조선을 설립했다고 보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교과서들도 이를 바탕으로 해당 연도를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333년은 옛 서적들에 의한 것으로, 실제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서는 고고학 발굴 결과를 기초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의 청동기 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단군이 신화 속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단군을 실존 인물로 교과서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반영하였으며, 고조선을 이동 국가에서 확정된 넓은 강가의 영역을 유지하는 영역 국가로 기술하기도 했습니다.
단군신화의 ‘환웅’은 청동기 시대에 나타난 외래 세력과 토착 세력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이기 때문에 이를 섣불리 인정하거나 신격화할 경우 역사의 왜곡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어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기록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에 집필된 책에서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면서 처음 사서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필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서 많은 학자들은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책에서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기록들은 조선을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요동에서 한반도 북서쪽에 위치한 여러 집단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여 ‘비파형 동검’ 등의 청동기 문화를 기초로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했으나, 이들이 후에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로 성립되었습니다.
그 이후 중국 연나라의 기록에서는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나타납니다. 이 시점에서 고조선은 고대 국가로 발전하여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부터 고조선에는 ‘왕’이라고 칭하는 군주가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조선의 도읍은 여러 차례 옮겨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처음에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이후 백악산의 아사달로 옮겨 1500년간 통치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조선의 왕으로 책봉되자, 단군은 도읍을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학설 중 하나는 고조선이 초기에는 랴오둥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연나라의 침입으로 영토를 잃고 평양 근처로 중심지를 옮겼다고 추측합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시기인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왕검성으로, 현재 북한의 평양시에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또 다른 조선, 위만 조선
고조선과 엄격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조선인 ‘위만조선’은 기원전 195년, 한나라가 연나라에 임명한 노관들이 흉노로 변하자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기 시작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조선의 복장을 하고 망명하였고, 고조선의 왕인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거짓으로 중국군대가 침입한다고 하며 수도인 왕검성에 들어와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만조선’의 시작입니다.
위만은 이민 집단과 토착 집단을 함께 다스리며, 양측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중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특히 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주변 세력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주변 여러 나라들이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했습니다.
한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위만조선은 내부의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외교적 활동이 벌어졌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결국 한나라와 위만조선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내부에서는 분열이 발생했습니다. 여러 관료들이 중국에 항복하는 상황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까지 한군에 투항하게 됩니다. 결국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였습니다.
위만조선 시기는 대한민국에 철기를 도입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철이 생산되고 연마되었으나, 위만조선 시기에 철기가 고조선 지역에 한층 보편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기원전 3~2세기에는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면서 철기 문화가 사회 발전 및 생산량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이로 인해 농업과 수공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대외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강력한 정치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서 지배층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