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이 세상을 떠난 후, 중국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환점은 568년에 양견이 대장군과 수국공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양견은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 뒤, 중국 통일을 철저히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양견은 우문윤의 죽음 이후 권력을 독점하며 중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먼저 장성을 복구하고 북쪽의 돌궐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습니다. 또 한구의 개착과 장강의 연결을 통해 전쟁에 필요한 보급로를 확립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북조의 후량을 병합하고, 전쟁의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이후 588년에 양견은 진나라에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후에 수나라의 황제가 되는 양광이었으며, 군사 수는 51만 8천 명이라는 대규모 군대가 진의 수도 건강을 향해 진군했습니다. 전쟁의 결과,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우물에 숨었지만 결국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랜 분열의 시대는 끝나고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었습니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은 589년에 수왕의 자리에 오르며 새로운 국가 체제를 세웠습니다. 그는 북쪽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돌궐과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수나라 사신들을 여러 차례 고구려에 보내 영토를 탐색하고, 지형과 군사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고구려의 평원왕은 이러한 소식을 빠르게 알아채고, 수나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평원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방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의 수 문제는 이 사실을 알고도 방어 준비를 무시하고,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대군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수륙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수륙병진의 전략으로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군이 평양으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대부분의 병력을 잃게 되었고, 결국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수나라의 첫 원정에서 큰 실패를 의미했으며, 고구려와의 전쟁의 서막이 아닌 고구려의 방어 승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수나라와 고구려
수나라의 30만 대군이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고구려 영양왕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수나라의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하며 고구려의 무역로를 차단하고, 그 영토를 염탐하려 했습니다. 이에 고구려의 영양왕은 자신의 신하에게 사죄의 뜻을 담아 사절을 보내 “신하 아무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조공의 부당함을 주장했습니다. 수 문제는 이에 감동하여 군사 작전을 철회하고 고구려와의 관계를 원래대로 돌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수 문제의 사후,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다시 급변했습니다. 양제는 즉위하자마자 대규모 토목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북방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새롭게 쌓았고, 대운하의 공사를 재개하여 북경에서 항주까지를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이 대운하는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필요로 하는 공사였기에, 백성들은 점점 더 큰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양제는 또 다른 큰 공사로 낙양에 새로운 동경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수도 장안을 대신하여 낙양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 것 역시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이는 점차적인 불만과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공사들은 후에 남북 융합의 초석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지만, 당시에는 그 규모와 난이도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내부의 문제를 외면한 채 양제는 북방의 돌궐과 토욕혼을 정복하려는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들 북방 부족을 제압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양제는 고구려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지만,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러한 요구를 계속해서 거절했습니다. 조공 요구가 계속되자, 수 양제는 612년 정월에 113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침략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수 양제의 대군은 고구려의 수성전과 청야전에 대응하면서 점점 와해되어 갔습니다. 또한 요동 지역의 혹독한 기후도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고구려의 막리지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수나라 군의 30만 대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을지문덕과 여러 고구려의 명장들은 뛰어난 전술로 수나라의 침략을 저지하며 전쟁을 종결지었습니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고건무는 이후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후 수 양제는 고구려를 몇 차례 더 침입하려 했으나, 수나라 내부의 반란과 혼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격 계획은 무산되거나 실패했습니다. 결국 617년에는 내부 반란으로 인해 수나라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영류왕이 즉위한 이후, 그는 친당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고구려-수 전쟁에서 잡혀간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당나라와의 교류를 확대했습니다.
또한, 백제와 신라는 당나라에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했지만, 당나라는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의 화친을 요구했습니다. 영류왕은 이 요구를 수용하여 백제와 신라와의 화친을 체결하며, 삼국 간의 외교 관계를 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외교 정책은 고구려의 정세 안정과 국제적 입지 강화에 크게 기여하며, 고구려는 이 시기에 삼국 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말년
고구려는 수나라의 멸망 이후, 당나라와도 깊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사신들은 고구려에 몰래 들어와 지리를 조사하고 군사력까지 파악하는 등 사실상 간첩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고구려는 천리산성을 쌓아 당나라의 공격에 대비하려 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이 공사의 감독을 맡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고구려의 방어력을 강화했습니다.
연개소문이 강력한 대외 정책을 펼치는 동안, 고구려의 중앙 귀족들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에 연개소문은 막리지의 난을 일으켜 왕과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자신은 대막리지라는 새로운 직위를 신설하여 스스로 그 자리에 오릅니다.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후 연씨 정권을 대대로 세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연개소문은 강경한 대외 정책을 펼쳤고, 이는 당나라와 신라 간의 동맹 형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하였으나, 고구려는 훌륭한 방어전략과 용감한 전사들 덕분에 당나라 군대를 크게 무찌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고,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을 위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백제의 멸망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고구려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며 방어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전쟁은 고구려의 백성들의 생활을 파탄에 빠뜨렸고, 국가 재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고구려 지배층 내에는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고, 국가의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사망한 후, 그의 맏아들인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연남생의 통치 아래에서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고, 이는 고구려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는 고구려 남쪽의 12성, 763호, 3543명의 주민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했습니다. 이렇게 북쪽에는 당나라에, 남쪽에는 신라에 각각 투항하게 되면서 고구려는 심각한 내부 분열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내부 분열이 심각해지면서 고구려는 결국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 사후의 혼란과 외부의 지속적인 공격의 결과였으며, 이로써 한반도 삼국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